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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
遺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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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약 천오백 년 전, 인간이 만들어 낸 '최초의 신'이 죽고 그 신체가 석화되어 조각난 것. 대체로 딱딱한 보석의 형태이다. 크기에 따라 예해와 주해, 두 종류로 나뉘며 통틀어 유해라고 칭한다.
기원
태초에 인간이 있었다. 인간들은 욕망과 마음이라는 무형의 힘을 가져 세상이 곧 그들의 움직임에 따라 변화했고, 크고 작은 나라가 피었다가 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욕심은 구체화하고 풍요는 오만과 몰이해를 불러일으켜, 욕망은 충돌하고 감정 또한 어긋났으며 더해지는 과욕이 쌓이고 쌓여 독이 되었다. 자연은 더 이상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내어주지 않았고 짐승들이 인간의 터전을 침범했다. 하늘에 붉은 구름이 뜨고 오색찬란한 꽃들이 검게 물들어 죽음의 향을 풍기니 많은 사람이 세상의 구원을 기원했고, 그 믿음에 따라 세상에 최초의 신神이 현현했다.
신은 바람을 이루어주었으나 완벽하지 않았다. 세상은 여전히 마냥 풍요롭지만도, 평화롭지만도 못했다. 이에 신에 대한 믿음이 떨어지니 힘의 원천을 잃은 신은 나날이 쇠약해져 가고, 사람들은 이전에 그러했듯 다시 제각각의 소원을 가져 감정들이 충돌하고 모순되기 시작했으며, 개인의 욕심을 위해 신성을 독차지하고자 하는 이들까지 생겼다. 결국 어긋난 마음과 과욕이 신을 살해하고, 생명력을 잃은 유해는 딱딱하게 굳고 조각나 온 세상에 흩어졌다.
주해鑄骸와 예해兒骸
산산이 흩어진 유해는 더는 온전치 못했으나, 그 각각의 파편에는 신묘한 힘이 있었다. 유해의 파편은 크기에 따라 그 능력이 달라졌는데, 합쳐 더 크게 만들 수 있었으며 크기가 커질수록 보다 ‘최초의 신’에 가까운 힘을 지녔다. 사람의 심장 크기보다 큰 것을 주해鑄骸, 작은 것을 예해兒骸라고 칭한다.
주해는 자아를 갖고 인간이 소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힘을 지녔다. 그렇게 주해를 씨앗 삼아 태어나고 자아를 가져 초월적인 능력으로 사람들의 소원을 이루어줄 수 있는 존재를 현신現神이라고 부르며, 주해는 현신의 핵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잠재력을 가진 무기물에 불과한 주해가 현신으로 탄생하기 위해서는 최초의 신이 그러했듯 반드시 사람이 있어야 했다. 인간으로부터 비롯된 탓에 그 형태는 인간을 닮아, 주해는 현신의 심장이 되어 육신과 자아를 만들어내고 그렇게 태어난 현신의 힘은 인간의 소원과 연관되었다.
주해가 자아를 갖고 현신으로 거듭나는 데에는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있었는데, 모두 인간의 믿음과 기원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 공통적이다. 그 방법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주해의 근방에서 많은 사람이 특정한 것을 기원하며 치성을 올리는 마음에 반응하여 태어난다.
둘째. 드문 경우이지만, 오랜 시간 존재하며 사람의 손을 타고 인간의 마음과 함께한 물체에 주해가 스며들어 깃들고 태어난다.
셋째. 공물을 바치고 사당을 짓는 등, 사람들이 우상으로 숭배하는 물체에 주해가 깃든다.
대체로 첫 번째 방법이 제일 흔했으며, 주해가 다른 물체에 스며들어 깃드는 형태는 비교적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 ‘감응’이 가능한 예해의 주인이 주해의 근방에서 강한 기원과 함께 바람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을 갖고 힘을 부여하여 현신이 태어나는 경우도 있었다.
예해는 사람의 원을 이루어주는 힘을 지니지는 못했으나, 대신 인간과 공명하여 주인에게 현신과의 ‘감응’이라는 특별한 힘을 부여한다. 현재 공식적으로 기록된 예해의 주인은 전체 인구 대비 1푼 정도로 추산되나, 최초로 예해의 주인이 된 이들에 대한 기록은 남겨져 있지 않다. 다만 알려진 것은 자의와 타의를 불문하고, 어느 경우에든 예해를 만 하루 동안 소지했을 때 예해가 그 사람에게 귀속되어 예해의 주인으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예해의 주인이 되면 예해를 버리거나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다. 예해는 주인에 대한 귀소성을 가져 타인에게 양도하더라도 만 하루 이내에 본 주인에게 돌아오며, 예해의 주인이 변경되는 건 기존의 주인이 사망했을 때뿐이다.
주인의 사망 후 예해의 행방은 기존 주인의 마음가짐에 따른다. 주인이 특정인에게 예해를 양도하고자 했다면 사망과 동시에 지정인이 예해의 새로운 주인이 될 기회를 얻고, 주인이 없기를 바랐다면 사망과 동시에 아무도 소유하지 않은 상태로 돌아가는 식이다. 후자의 경우 이후 최초로 해당 예해를 습득한 사람이 새로운 주인이 될 기회를 가질 수 있으나, 그 어떤 경우에도 예해가 특정한 사람에게 귀속되는 데에는 만 하루가 걸린다. 그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예비 주인과 떨어졌을 경우 그 예해는 다시 주인이 없는 상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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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현신
현신現神
주해를 씨앗 삼고 사람의 믿음과 기원을 양분 삼아 태어난 존재를 현신이라 칭한다. 이들은 탄생 시 영향을 받은 기원과 연관된 능력을 갖춰 사람들의 바람을 이루어주는 특별한 힘을 가졌다. 첫 현신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이들은 ‘최초의 신’이 사라진 이후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인간과 함께 섞여 세상의 곳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현신은 인간을 닮았으나 뿔과 꼬리, 비늘, 날개 등등 인간에게서는 발견되지 않는 신체적 특징을 부가적으로 지니는 경우가 잦으며 이는 그들의 능력과 대체로 연관이 있다. 또한 신체의 생성 구조와 구성 요소가 인간과 다른 탓에 시간의 흐름에 영향을 받지 않고 노화를 겪지 않는 등 인간과 다른 점이 많았다. 신체의 구성 요소는 현신마다 달랐기에 상처를 입더라도 사람처럼 피를 흘리는 대신 피부에 금이 가거나 바위가 부서지듯 깨지고, 색색의 액체가 흘러내리는 등 여러모로 인간과는 달랐다.
현신은 불로不老의 몸이었으나 불사不死의 몸은 아니며, 현신이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알려져 있다.
첫째. 자신을 믿는 인간이 세상에 더는 존재하지 않을 경우.
현신은 인간의 신뢰, 신앙, 그 무엇이든 현신의 존재와 힘을 믿고 자신을 인식하는 인간이 있어야만 존재를 유지할 수 있으며, 이는 근원적으로 현신이 인간의 믿음으로부터 비롯된 탓이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경우 현신은 신성과 자아를 잃으며, 주해는 현신의 육신으로부터 이탈해 무기물로 돌아간다.
둘째. 심장 부근에 자리 잡은 주해가 깨지거나 제거되는 경우.
여러모로 외관적으로도 내부적으로도 인간과 다른 점이 많다고는 하나, 현신의 신체라고 하여 금강석처럼 단단한 것은 아니다. 외상과 내상을 불문하고 사망에 이를 정도의 타격을 받게 되면 주해가 부서지고, 현신은 신성과 자아를 잃는다.
자아를 잃은 주해가 다시 현신으로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설령 같은 소원에 반응하여 같은 능력을 갖추고 태어났더라도 새로이 탄생한 현신은 이전의 현신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존재다. 고로, 이 두 가지를 일컬어 사(死). 죽음이라 불렀다.
인간과 감응
인간은 세상의 중심으로, 글이 없던 때 글자를 만들어 문명을 이룩하고, 곡식을 추수할 수 있는 농기구를 만들어내는 등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아가니 곧 이 세상의 정점이라 해도 이상할 게 없다. 결국 자신들의 믿음과 마음을 자원으로 삼는 학문마저 창시하니 가히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가졌으나, 또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노쇠해지고, 다치면 피를 흘리며, 때로는 너무 쉽게 명을 달리하기도 했으나 또 아주 험난하고 기나긴 생애를 끝내 버텨내기도 하는 것이 인간이다. 겉으로 보이는 생김, 성격, 마음, 살아가는 방식 등 하나부터 열까지 세상에 똑같은 이 없는 것 또한 인간이었다.
백여 년이 채 못 되는 짧은 생애라 할지라도 치열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소원은 끊이지 않았다. 가뭄이 오니 비를 내려달라 빌고, 풍년이 들어 곡식이 잘 영글기를 바라는가 하면 사냥에서 무사히 돌아올 수 있기를 빌었다. 하여 새로운 현신은 끊임없이 태어났고 사방에 존재했다. 눈에 익은 것들을 어려워하기는 어려운 탓에, 현신에 대한 인간의 감정은 그들이 ‘최초의 신’에게 경외심과 존경심을 가졌던 것과는 제법 다른 양상을 보였다. 현신과 인간의 관계는 경우마다 제각각이어서, 친구나 이웃처럼 친근하게 여기는 부류, 도구처럼 다루어 자신의 욕망을 우선하는 부류 등 갖가지였다. 인간관계가 다양한 모습을 보이듯, 현신과 인간 간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감응에 대하여
감응이란 현신의 주해와 인간의 예해가 공명하여 일시적으로 결속되는 것을 뜻하는데, 인간 중에서도 예해를 지닌 이들과 현신은 서로 감응할 수 있다. 현신과 감응 중인 인간은 해당 현신이 부릴 수 있는 힘 일부를 빌려와 다룰 수 있게 되고, 현신은 타고난 능력을 좀 더 광범위하고 강력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며 현신과 인간 모두 공통으로 신체 능력이 일시적으로 소폭 상승한다. 인간의 경우 현신의 힘을 빌리고 있다는 증거로, 특정 부위에 문양이 나타났다 사라지거나, 홍채 혹은 머리카락의 색이 변하는 등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외관상의 변화가 일시적으로 일어나기도 한다. 이러한 효과 및 변화들은 감응이 이루어진 순간부터 만 하루 동안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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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해의 주인과 현신이 감응할 수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었으나, 정작 그 정확한 방법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진 바가 없었다. 인간과 현신이 서로 감응하기 위해서는 상호 동의 하에 특정한 절차를 밟아야 했다. 절차는 크게 두 단계로 나뉜다.
첫째. 각자 ‘소중히 기억하는 것’, ‘생각하는 것’, ‘바라는 것’을 중 하나를 골라 거짓 없이 읊는다.
둘째. 현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을 인간이 받아 스며들게 한다.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이 두 가지를 행하고, 감응하는 것에 서로 동의하면 감응은 이루어진다.
다만 서로 다른 존재가 공명하는 것이었기에 드물게 부작용이 존재했다. 예해를 다루는 것이 미숙하거나 타고난 그릇이 작은 이들이 자만하여 감응을 시도할 경우가 대표적이다. 전자의 경우 예해가 현신의 힘을 오롯이 받지 못하여 보다 약하거나 되레 폭주하는 양상이 주로 관찰되었고, 후자는 육체가 힘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내리는 게 대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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